「혁명의 수도」선포…금속·건재 공업이 주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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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평양은 83년 3월이래 18개 구역(중 평천 보통강 모란봉 서성 선교 동대원 대동강 사동 대성 만경대 형제산 용성삼석 역포 승호 악낭 순안)과 4개군(강남 중화 상원 강동)으로 구성되어 오고있다.
행정조직상 시 단위의「구역」은 생산시설, 배급소, 교육·녹지시설 등을 갖추어 사실상 주민의 생활권역을 이루므로 평양은 이 같은 구역의 연합체로도 볼 수 있다.
총면적은 2천8백평방㎞로 서울의 약 4배지만 도시화된 지역은 5%내외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며, 인구는 해방직후의4·5배인 1백8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북한당국이 45년11월『평양시를 혁명의 중심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꾸밀 것을 결정한 이래 평양은 북한의 어느 지역과도 비교될 수 없는 비중아래 건설이 집중되어 왔다.
「혁명수도」건설은 평양이 특별시로 승격된 46년 상습침수를 유발해온 보통강의 개수공사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평양은 6·25를 거치며 완전한 잿더미로 되돌아갔다.
전후복구사업기인 50년대 후반 평양에는 소련 식 6층 아파트가 대거 세워졌다. 이시기에 등장한 것이 평양속도. 58년 2월부터 10개월 동안 분발한 노동자들이 7천 가구 분의 자재·자금·노동력으로 2만 가구의 살림집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불과 14분만에 한 가구씩 조립했다는「평양속도」는「천리마속도」와 함께 사회주의건설의 발전속도를 내세우는 대명사로 통한다.
그러나 이때 지은 소련형 아파트들은 이제 와서는 그냥 살기도, 헐기도 어려운 전후유산으로 평양당국의 골칫거리로 알려지고 있다.
전후복구사업이 일단락 지어진 60년대는 대동강 서안의 기존도심지를 중심지로 도로·공공시설물 공사등 비교적 소규모공사가 진행됐다. 평양 대극장·평양 교예극장, 그리고 1천여명의 어린이를 1주일 단위로 수용하는 평양 9·15 주 탁아소가 이 시기의 산물이다.
북한당국은 72년 평양을「혁명의 수도」로 선포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선전도시로서 본격적인 대형건조물 축조, 주택 및 시가지건설에 들어갔다.
80년대 들어 김정일이 이에 직접 나서 시내 중심도로 확장 및 건물의 대형화·고층화가 적극 추진되어오고 있다.
82년의 김일성 70회 생일을 기념하는 인민 대 학습 당·개선문 등과 함께 높이 1백70m의 주체사상탑이 들어섰다. 이어 충성의 다리·낙랑다리·양각다리등 대동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량이 설치됐다.
주택사업으로는 보통강 구역, 중구 역의 창광거리·천리마거리, 그리고 동평양의 문수지구·낙랑지구 등에 약 3만 가구, 시 외곽 지역엔 약5만 가구의 고층아파트가 건설되었다.
특히 최근 들어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대비한 평양의「국제도시화」작업에 40억 달러정도가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대표적 건설사업으로 광복거리건설·안골체육촌, 그리고 유경(유경)호텔신축을 들수 있다.
광복거리건설은 만경대 부근의 폭 7∼8m, 길이 6㎞와 도로를 폭 1백m의 직선도로로 확장하고 이 주변에 호텔·학생소년궁전·국제문학회관, 그리고 12∼30층 규모의 고층아파트 약 2만가구분을 세우는 것으로 지난달 완공을 보았다.
87년에 착공, 밤낮 없는 돌 관공사로 1년 남짓만에 1백5층의 골조가 완성된 유경호텔은 높이 3백m, 객실수 3천 개의 세계최대 호텔로서 평양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놓았다.
평양의 공업은 금속·건재·일용품생산이 중심이며 남포·대안·송림·사리원일대를 묶는 평양공업지구는 북한 최대를 자랑한다.
이 공업지구는 경공업에서 중공업까지를 망라하며 군수공장(강동정밀공장)및 군수전환공장(만경대불도저공장)등을 고루 갖춘 것을 특징으로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 최대의 강선제강연합기업소를 비롯, 금성트랙터공장·대안전기공장·김종태 전기기관차공장·4월13일 제철소·평양종합방직공장·평양곡산공장 등을 들 수 있다.
북한의 도로 및 철도망의 중핵인 평양은 항공편으로 북경·모스크바와 연결되며 87년 산월부터 동베를린까지 항로가 연장됐다.
한편 8년 전에 건설된 지하철은 지하 85m에서 도심부를 동서, 남북으로 교차하고 있다. <전택원 기자>